
지난 3월22일 부터 4월 17일 까지 서울 각지에서 열렸던 페스티벌 봄에서 한스페터 리쳐의 <웃는 소를 기다리며>를 보고왔다.
종로구 원서동의 어느 작은 가정집에서 펼쳐진 매우 흥미로웠던 이 공연에 대해 포스팅해볼까 한다.
우선 딱딱하게나마 공연의 기본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캐나다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을 잠시 들먹이고자 한다. 그의 저서 < Presentation of self in everyday >에서 '모든 사람'들은 다른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 만의 어떤 인상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행동은 마치 배우라는 가면을 쓰고 공연하는 것 처럼 연극적이라고 했으며, 우리는 삶을 영위하는 모든 공간을 마치 커다란 공연무대처럼 사용한다고 했다. 이러한 관점은 '공연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할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지적이다. 결국 공연이라는 것은 < '특수한 공간'에서 벌어진 '특수한 사건'의 관찰 > 이 결코 아니며 우리생활과 아주 밀접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커피숍에 앉아서 어떠한 무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잠깐 씩 들려오는 이야기 만으로도 너무 재미있을 때와 같은 상황이다. 그럴 때 나는 나름대로 대화를 엿들으면서 그들의 공간을 가상의 프레임으로 가두고, 어디선가 지켜보는 하나의 관객이 되어본다- 이것이 아주 재밌는 연극 한 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 역시 누군가에게 관찰되어지는 하나의 배우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사회라는 공연무대에 존재하는 배우임과 동시에 관객인 것이다.
내가 만드는 공연
그렇다면 관객이 참여하는 공연 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최근 INTERACTIVE의 시대를 맞이하여, 문화계 전반에서 '소통과 상생'이 라는 문구를 자주 접하게 되지만, 과연 내가 그들과 INTER-ACTIVING 하고 있는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없어졌다고 해서 혹은 배우가 나를 무대로 이끌어내어 무언가를 행동케 했다고 해서 그들과의 소통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 경계를 허물기' 와 단순한 '관객 참여'에는 내적소통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관객인 동시에 배우가 되는 환경'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면 매력적인 상황일 것이다. 그야말로 관객 스스로가 지금 일어나는 사건의 발단, 과정 그리고 결론을 좌지우지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한스 페터 리쳐의 <웃는 소를 기다리며>가 이런 지적에 대한 매우 유쾌한 고민이었다. 우리 모두가 배우 였으며 우리가 그 시간에 벌어진 어떠한 사건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서동의 어느 가정집에 도착했을 때, 한스페터리쳐는 문앞에서 우리를 맞이하였다. 그는 마치 초대된 손님들을 다루듯, 우리에게 자신은 이 집에 살고 있는 박잉란(PARK ING LOT)이라는 어느 한국인 여성에 대해 연구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집에서 그녀가 북한의 스파이 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전했으며 그 집에서 발견한 여러가지 증거들과 정황들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를 집안으로 이끌었다. 집안에 들어선 그는 그가 발견한 몇가지 사실에 대해 설명했다. 또한 그 증거자료들를 보여주었다.
박잉란씨는 어쩌구 저쩌구..중략 듣다보니 도대체 그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우리에게 하고 있다. 이건 무슨말인지 도통 알수가 없네 이 친구…하고 있을 그 때, 갑자기 아주 재미난 사건이 벌어졌다. 관객한명이 그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어쩌구 저쩌구 하셨는데 그럼 여기 걸린 이건 뭐죠?' 이 때 부터 그의 이야기는 아주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하며 더더욱 알수없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온통 의문점 투성이인 그의 장난스런 설명에 이제 궁금증을 참을 수 없는 관객들이 다양하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설명하지 않는 그는 그럼에도 거침없이 내뱉기 시작한다. 화려한 언변으로 그 대답을 잘 피해나가면서-
처음부터 눈치빠른 관객은 알았겠지만 그 집에 살았던 스파이였다고 그가 주장하는 박잉란 씨는 영어 철자가 PARK ING LOT, 즉 Parking Lot 이다. 또한 사건에서 중요한 개념이 되는 어떤 책에 대해 한참 설명한 뒤 그 책의 제목은 bullshit (개소리)라고 말해버린다.

(그의 집에서 발견되었다 주장하는 손수건, 세계에 단 3장이 있으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함)
INTERACTIVE : 포럼 연극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 하고자 했을까? 결론적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그를 만나서 그의 bullshit을 들으면서 질문을 던지고 함께 '그날의 사건'을 만들어내는 동안 우리의 대화와 정황은 어떠한 결론도 가져다 주지 않았다. 그는 허구와 진실을 오락가락 하며, 만들어낸 이야기가 하나의 맥락을 만들었다가 또 사라졌다. 오히려 더 중요한 사실은 그 '거세된 맥락속의 사건'은 분명 그와 우리가 함께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무대 라는 환상을 깨기 위해 과감히 원근법을 포기했지만 무대형태로는 여전히 프로시니엄을 고수했다. 그래서 '소외효과(Verfremdungseffekt)'를 통해 관객이 공연을 철저히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성찰할 수 있게 했더라 하더라도, 이런 형태의 공간 구성에서 무대/객석의 분리는 여전히 존재하였다. 그에 따라 능동적이고 활발한 관객 참여, 즉 INTERACTIVE는 한계점을 보였었다. 그러나 한스페터 리쳐의 공연을 살펴보면, 공연의 공간은 완전하게 투명해졌다. 무대적 환상과 관객/무대의 경계를 나누던 제4의 벽은 무너졌으며, 그 날 그 날의 관객에 따라 새로운 맥락을 통한 그 날 만의 사건이 발생했음을 예측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그 날의 공연을 길게 만들 수도, 엉망이 되게 할 수도 있었으며, 어마어마한 반론을 제기하며 그를 당황시킬 수도 있었던 위대한 존재였다.
포럼연극의 창시자인 아우그스토 보알이 말하길 '모든 인간 사회는 일상 속에서 다양한 볼거리를 내놓으며, 의식하진 못하지만 인간관계는 늘 연극적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공간의 사용이나 몸짓 언어, 단어 선택, 억양, 사상과 감정대립등이 모두 하나의 연극이라는 것, 그것은 단지 춤을 추거나 노래를 할 때가 아니더라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회의를 하며,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어딘가를 걸어갈 때도 모두 적용된다고 하였다.
한스페터 리쳐는 우리의 인간의 일상적 COMMUNICATION이 매우 연극적인 것들임을 알고, 연극이 일부러 환상을 만들어내지 않고도 우리가 대화하고 공감하는 것을 공연으로 조명하여, 억지로 무대가 관객과 소통하려는 장치 없이도 우리를 자연스레 함께 공연을 이끌어내야만 하는 동반자로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 소통의 조타수로써 이런 발칙한 실험을 매우 유쾌하게 전달하고 있다.
By doroom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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