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토요일 LG 아트센터에서 있었던 하이너 괴벨스의 공연 <나는 그 집에 갔지만, 들어가지 않았다.>를 보고 왔다.
실제로 괴벨스의 공연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많은 기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공연은 총 3개의 막으로 T.S. 엘리엇의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1917)", 모리스 블랑쇼의 "낮의 광기(La folie du Jour,1949)",사무엘 베케트의 "(Worstward Ho,1982)"의 텍스트에 음악을 붙여서 만든 음악극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공연이 시작하고 첫번째 막인 T.S엘리엇의 시가 끝났을 때, 나는 매우 당혹 스러웠다. 시의 내용은 전혀 알아듣지 못할 만큼 난해했으며, 솔직히 지루하기까지 했다.
음악은 하나 혹은 두개의 음계로만 구성된 단조롭고 괴상한 하모니를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더욱 집중해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들으려 애썼다. 그러나 텍스트에 집중할수록 더욱 알수없는 미궁에 빠져드는 것이다. 역시 난 이해 할수없는 예술의 세계인 것인가하고 생각이 들때 쯤, 베케트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두번째막이 시작되었다. 실패에 관한 그의 반복적인 글들이 스크린을 통해 전해졌을 때, 갑자기 읽어서는 결코 이해가 불가능한, 단지 리듬감과 실험적인 반복효과를 통해 텍스트의 음악성을 살리려했던 그의 소설들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렇다! 나는 왜 공연이 반드시 텍스트의 내용을 재현하고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실제로 20세기에 들어선 공연은 그야말로 '텍스트의 위기'를 맞이한 것처럼 보인다. 권위파괴, 진리의 부정, 해체, 경계넘기 등이 포스트모던이라는 근사한 듯 한 주제를 통해서 줄거리를 구성하는 텍스트들이 주도권을 상실하고, 언어 외적인 표현요소를 이용한 다양한 실험('포스트 드라마' 라고들 한다)이 진행되고 있는게 사실이다.(물론 IN THE B 생각하는 '공연'의 개념에서 이런 현상들은 공연이 본래 문학의 영역에 속하는 희곡의 지배에서 벗어나 공연의 본래적인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순간 스치듯 지나가는 생각들 속에서 괴벨스는 이러한 위기를 확실히 극복하기 위해 앞서 언급된 '포스트 드라마적인 시도'가 아닌 텍스트가 가진 음악성을 공연에서 이용하고자 한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가 갖는 개인적 발화형태를 빠롤(parole) 그리고 사회적 약속을 랑그(langue)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언어의 사회적 관습과 약속, 즉 랑그가 없는 빠롤 만으로는 상대방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고 했으며, 결국 개인의 무한한 발화체계는 랑그라는 언어규칙에 의해 통제되기 때문에 무한한 상상력의 빠롤은 결국 랑그에 의해 결합될 뿐, 새롭게 창조되지는 못한다고 했다.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다. 수 많은 음악체계(음악성을 가진 체계)가 랑그체계인 음계체계에 의해 결정되다고 볼 수 있다.(빗소리와 새소리도 좋은 음악체계, 음악성을 가졌음에도 음계체계에 포함되지 않는 것을 보라-) 그러나 괴벨스는 음계체계의 한계극복을 오히려 텍스트에서 찾았던 것 같다. 마치 슈톡하우젠 (Karlheinz Stockhausen)이 음계체계의 극복을 위해 1954년 전자기기를 이용해 특별한 주파수와 볼륨조절로 음악을 만들었던 것 처럼-(전자음악의 시작이라고 볼수 있다.)
그는 텍스트를 명쾌하게 읽어내려갈 때 느껴지는 음율감, 부드러움, 리듬감이 너무나 아름다운 음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공연 중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고 난 후, 다시 공연에 집중하게 되니, 한결 대사가 편하게 들리게 되었다. 텍스트의 내용,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고
텍스트가 가진 음악성에 귀를 기울이게 되니 묘한 감동이 밀려오는 것이다. 그 텍스트의 높낮이를 따라가고, 반복적인 리듬을 느끼게되면서-
갑자기 공연 전, 김선옥 하우스매니져의 낭랑한? 목소리로 분명 ' 3번째 막은 연출가의 의도에 의해 자막이 나오지 않는다' 고 공지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것이다. 괴벨스는 우리가 텍스트가 가진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길 바랬던 것이다!!
'텍스트의 위기'에 닿아있는 공연을 '탈텍스트 혹은 포스트드라마'적인 시도가 아닌 오히려 텍스트의 색다른 미학을 공연에 이용하는 것은 얼마나 창조적인가!
물론 이러한 시도는 이제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아직은 어렵고 난해하지만, 그것 자체가 커다란 의미다. 예술의 현재성은 내일 존재하기 때문이다. 슈톡하우젠의 미친 시도(나는 감히 B적인 발상이라고 말하고 싶다.)가 없었다면, 지금의 Justice와 Tiesto는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 어떤 변화가 생기게 될진 모르겠다. 다만, 괴벨스는 우리에게 새로운 음악과 공연에 대한 대답을 해주는 대신,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괴벨스의 공연은 31일, 4월1일에 통영국제음악축제에서 계속해서 만날수 있다.
후기 끝
By Doroom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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